오디오 입문

오디오의 즐거움을 찾아서

AdultKid(오디오/스피커) 2012. 3. 28.

● 필자소개 

송재유 선생님은 음악과 오디오를 가까이 하시는 생활을 하시고 공직생활이후 국내 유수의 오디오잡지에 오디오평론 및 음악기고를 하고 계시며, 특히 클래식 음악부분에 해박한 지식을 절제되고 정확한 필치로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불나비닷컴에 모시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감사 드리는 바입니다.





오디오의 즐거움을 찾아서


”골프의 3대 즐거움” 이라는 말이 한때 있었다. 첫 번째가 18홀을 라운딩하는 운동, 두 번째가 운동을 마친 후의 목욕, 그리고 세 번째가 목욕 후 식사의 즐거움인데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오디오를 평생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3대 즐거움” 을 적용할 수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첫 번째. 오디오기기 업그레이드하기 (소위 “바꿈질” 로서 때론 고통이 수반되기도 함). 

두 번째. 음악 듣는 즐거움. 

세 번째. 소프트 (LP, CD, DVD 등) 모으기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살아있는 동안 하루하루를 두려움 없이, 보람 있고, 재미있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오디오라는 대상에 대한 열정을 평생 지속하면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한두 해 전에 90세를 넘기신 피천득(皮千得) 선생께서 인터뷰하신 내용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요즘도 하루에 몇 시간씩 클래식 음악을 들으신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아있다. 


인간은 몇 살까지 온전하게 들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부호가 요즘 부쩍 뇌리를 스친다. 집안에 어떤 어른이 돌아가실 때 임종하는 이들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큰 소리로 울거나 슬픔을 표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있어왔다. 청력(聽力) 이 다른 감각보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한 관광지 中






자기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미 아련히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릴 때, 훌쩍이는 막내의 애처로운 목소리, 할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손녀딸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면 이승을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울 것이리라…. 청력이 가장 늦게까지 남는다는 얘기엔 좀 위안이 된다. 


그러나 소리가 정상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는 내가 갖고 있는 몇 개의 시스템을 누구에게 이양할 것인가를 이미 생각해 놓고 있다. “알텍 스피커와 300B 앰프는 큰아들, 징갈리 스피커와 피셔 앰프는 둘째 아들에게 주고 우리 부부는 AR스피커와 리시버 앰프만을 떠나는 그날까지 간직하기” 이다. 


내가 본격적인 오디오 라이프에 발을 들여놓을 때 구입했던 최초의 기기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상태인 옛날 모델의 AR 스피커와 리시버 앰프를 이미 구입하여 안방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


아침 5시, 어둠을 찢는 자명종 시계 소리에 무거운 육신을 일으켜 세우고 세면장으로 간다. 양치질과 세수로 잠은 어느덧 저 멀리 밀려나고, 이윽고 조신(調身)과 호흡수련에 들어간다. 다시 태어나는 듯한 상쾌한 기분과 풀린 몸으로 아침 음악을 듣는다. 상념의 나래는 5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큰형님 방에 있는 일본제 진공관식 중파라디오에서 서울 남산의 중앙방송국 프로가 방송되고 있다. 







피셔 500 6L6 리시버 앰프






태엽 감아 돌리고 쇠 바늘 꼽아서 듣는 유성기에서 남인수, 고복수씨의 노래가 들린다. 그 당시로서는 문화생활(?)을 하는 집안이었다고나 할까? 해방 후 토지개혁과 6․25 의 모진 비바람은 더 이상 이러한 호사가 허용되지 않았다.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보냈던 초등학교 시절, 그날그날 어떻게, 무엇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느냐가 최대의 관심사요 행복의 기준이었다. 


라디오, 축음기, 음악 등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운 탓일까? 타고난 갈증을 참을 수 없었음인지 전등선의 한선과 접지선(-)사이에 광석을 연결하고 군용전화기의 수화기를 연결하여 듣는 광석라디오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나의 어릴 적 오디오 라이프는 시작되었다. 


때마침 50년대에 미군 PX에서 휴대용 라디오와 통신기기 부속품이 쏟아져 나왔고 MT관, GT관, 심지어 새끼손가락보다 약간 작은 진공관(일명 쥐새끼 관)을 사용하여 소형라디오를 만들었다. 전원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건전지(통신기기용 배터리)였다. 


경기도의 시골이지만 나의 고향 안성에는 "조음 라디오" 라는 라디오 방이 있었는데, 마침 우리 집 앞에 있어서 좋은 음악을 매일 들을 수 있었다. 807, 6L6과 같은 진공관을 사용한 큰 뒤주크기의 앰프를 조립하여 부유층에게 판매하는, 그 당시로서는 전문 오디오 숍이었다. 나는 매일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JBL L-65 스피커






그 점포에는 서울에서 공업학교를 나온 분이 있었는데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주었다. 그분으로부터 앰프 제작원리라든가 트랜스 감는 방법까지 배웠고, 6V6pp 리시버 앰프까지 자작하기에 이르렀다. 아예 앰프제작을 직업으로 택할까도 생각했었으나 집안 형님들의 충고로 그 뜻을 접었고 고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몇 년간은 음악과 오디오로부터 멀어졌다. 취침 때 구내 방송으로 잠깐 듣는 ‘백조’, ‘엘리제를 위하여’ 와 같은 소품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고학년 때에 자작한 리시버 앰프를 집에서 가져와 생도내무반 옷장 안에 설치해 놓고 틈틈이 음악방송을 들었다.


장교가 되어 전방근무를 마치고 서울지역으로 전보되어 결혼과 함께 생활이 안정되자 오디오에 대한 열정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었다. 텔레비전을 사러 갔다가 산스이 리시버, AR스피커와 턴테이블을 사고 말았다. 이후 바꿈질은 계속됐는데, 스피커는 AR에서 JBL로, 앰프는 마란츠에서 매킨토시로 변해갔다. 시스템 가격이 살고 있는 집 전세 값의 3배가되기도 했다.


80년대 초에 해외에서 8년간 근무하게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의 시골에서 태어난 놈이 문화유산으로 넘치는 곳에서 음악과 미술감상 그리고 오디오까지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은 크나큰 복이었다. 로마 오페라극장, 여름철의 ‘카라칼라’ 목욕장폐허에서 열리는 야외 오페라, 그리고 북쪽 도시 베로나의 아레나(원형극장)오페라 공연들…







좌 : AR 3a 스피커.  우 : 알텍 804-8g 스피커






푸치니의 ‘트란도트’, 베르디의 ‘아이다’와 ‘아틸라’,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등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어두운 객석에서 조그만 소형전등으로 리브레토를 비춰가며 가수들의 노래와 대화를 열심히 따라 읽어가던 여름 밤이 그립다. 공연이 끝나고 늦게 먹는 저녁식사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로마 시내 ‘테베레’강 건너편에서 있는 고색창연한 옛 시가지의 노천식당에 앉아 로마의 전통 만찬을 들고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다. 그런 곳에서 J 트리오도 만났고 유학생시절의 성악가 J양을 만날 수 있었다. 


로마 시내에는 아담한 째즈연주장이 20여 개나 있다. 바티칸 근처에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알렉산더 프라츠’에 자주 갔고 거기서 ‘조 헨더슨’의 섹소폰 연주를 듣는 행운도 있었다. 동양인인 나의 출현에 현지 이탈리아인 손님들로부터 호기심 어린 눈총도 받았지만, 그것은 차가움이 아닌 따뜻한 눈총이었다.


로마에서 만난 오디오 매니아 친구들을 잊을 수 없다. ‘오디오 벼룩시장’ 신문광고를 통해 만난 에우제니오는 나에게 "패트리샨 800" 을 기꺼이 양도했다. 60년대에 제작된 영국 Sugden 사의 ‘커니서’앰프를 나에게 양도한 세르지오는 오디오가 좋아서 결혼을 못한 노총각이다. 







마란츠 2285b 리시버 앰프






이 앰프는 최근까지도 내 곁에서 따뜻한 음악을 공급해 주다가 B전자의 L사장에게로 시집을 갔다. 그리고 마란츠7과 가라드301를 구해준 조르지오는 ‘마리오 델 모나코’가 사용하던 JBL의 하쓰필드를 자랑스럽게 소장하고 있다.마지막으로 스피커메이커 사장인 주세페 징갈리가 있다. 


그가 고안한 우드 혼 (wood horn) 은 옴니레이 (omni ray) 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어 일본의 "스테레오 사운드" 지의 "이해의 제품" 에 선정되기도 했다. 나는 92년도에 그가 만든 최상급기 (4웨이 5스피커) 로 멀티채널 시스템을 구성해 보았다. 


93년에 귀국하여 Y시 S읍 신봉리에 전원주택을 짓고 지하에 12평의 음악실을 마련했다. 실로 수십 년간 바랬던 꿈이 실현된 것이다. 몇 년간 이곳에서 징갈리의 시스템으로 음악 듣기에만 열중하며 살아왔다. 더 이상의 오디오 기기의 바꿈질은 않기로 했던 결심이 무너진 98년, 이 시스템은 A사의 N사장에게 양도되었다.


기기가 떠날 때의 심정은 가을날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참담했다. 오디오도 없이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2년 후인, 2000년 봄, 다시 오디오와 음악듣기로 돌아왔다. B전자의 L사장으로부터 알텍 A-7 과 사제 300B앰프, 가라드301를 공급 받았고, 중간 수준의 CD플레이어로 다시 시작했다. 







좌 : 가라드 301 턴테이블.  우 : 축음기






A-7은 소형앰프인 "커니서" 로도 고운 소리를 내주었지만, 300B 앰프를 연결한 뒤엔 밤 10시 FM음악프로의 K씨 음성이 매우 두툼해졌고,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듯이 분위기가 바뀌었다.


요즘엔 대편성곡보다는 소편성곡에 손이 자주 간다. 전에 들었던 곡들이 다시 새롭게 들리고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감흥이 솟는다. 나이 탓일까? 쉽게 감동해 버리는 센치멘탈리즘이 찾아온 걸까? 마음이 약해지고 갈 때가 가까이 옴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왜 저토록 가슴 저미는 슬픈 곡을 작곡했을까?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3악장 형식의 피아노 소타나에 익숙하면서도 각곡의 조(調)가 다른 슈베르트의 즉흥곡에도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웬일일까? ‘남겨진 날들’의 짧음이 주는 초조감에서일까……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울적할 때, 약간의 여윳돈이 생겼을 때 LP점이 몰려있는 회현지하상가에 가끔 나가본다. 단골가게 C사장으로부터 IMF 직후에 적지 않은 음반애호가들이 소장했던 LP를 내놓았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애지중지 소장하던 것을 내놓은 그분들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온 손때 묻은 귀중한 LP중에서 50년대 전후에 녹음된 모노판 몇 장을 샀다. 카트리치도 모노용으로 갈아 끼우고 바늘을 얹어본다. 바늘의 음압이 크게 증가되면서 피아노 타건의 파워가 파동쳐 온다. 마치 그분들이 가졌던 슬픔의 무게가 전달되어 오는 것 같다.







마란츠 2285 리시버 앰프와 마란츠 2230 리시버 앰프






요즘 출근하고 있는 연구소 책상에 있는 PC에 DVD드라이브를 장착하고 짜투리 시간을 이용, 틈틈이 음악공연을 담은 DVD 타이틀을 보고 있다. 가사전달이 잘 안되면 되감기로 다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편리성이 있어 좋다. 여기에 사운드카드도 멀티채널 용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아예 소규모 AV시스템을 구축할까 생각해본다. 


이미 이같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PC완제품이 상품화되어 시중에 나와 있지만, 내 PC로 활용 영역을 확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실험 수준에 그칠 것이다. 오디오와 음악잡지를 통해 최근 급속히 발전하는 하드웨어의 기술수준을 확인하고 있다. 


나는 SACD, DVD오디오 그리고 멀티채널 AV시스템 등에 아직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고 있다. 무언지 모를 두려움 때문이다. 실제 상황과 같은 연주에 탐익하여 빠져나오지 못하므로 서 내가 누려온 전통적인 오디오의 즐거움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아내는 영화관에서 ‘캐스트 어웨이’와 ‘글레디에이터’를 보고 난 후 AV시스템을 선호하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아내를 위해서도 언젠가는 AV멀티시스템을 시도하리라, 그렇게 되면 빈티지 오디오와 AV시스템을 번갈아 오고 가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귀가 잘 안 들리게 되면 AV쪽에 더 치우치게 될까 벌써부터 걱정된다.

글                  송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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