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 놀이

임진왜란 때 왜군이 가장 무서워한 부대는? 항왜 (사야가 김충선)

AdultKid(오디오/스피커) 2013. 1. 21.

디지틀조선 - 조민욱 기자.


조선 최강의 살수집단은... 바로 항왜였다    2009/07/17 00:32 추천 13     스크랩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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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게 공포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조총이라고 답했다면 섣부른 추측입니다. 조선 관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건 바로 일본도입니다. 조총은 원거리에서 상대방의 예기를 꺾는 데 주로 효과를 보았고, 근접전에선 단연 일본도로 무장한 사무라이들의 단병접전이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아군이 칼집에서 칼을 뽑기도 전에, 창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고 적이 휘두르는 칼에 두동강이 났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왜군의 복장. 저마다 허리에 일본도를 차고 있고 왼쪽에는 나기나타를 든 이도 보이네요. 활은 자신의 키보다 커군요.  

선조도 임란 당시 왜적의 놀라운 칼솜씨에 충격받고 조선군에도 살수(殺手)라 하여 창검술을 전문으로 익히는 부대를 육성합니다. 임금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키운 살수 부대는 조선이나 중국인의 자체 평가에서는 실력이 만족스럽다고 나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 중에 사로잡히거나 투항한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내린 평가는 어떠했을까요.

“아이들 놀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격분한 선조는 무관들에게 항왜(降倭), 즉 투항하거나 사로잡힌 일본인에게 검술과 창술을 배우라고 엄명을 내립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임란 당시 항왜의 숫자는 무려 1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항왜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첨지(정3품) 벼슬까지 오른 사야가 김충선이라는 인물도 있었지요. 그는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었죠. 투항 후 김충선은 왜군과의 78차례나 전투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김충선.jpg

아무튼 선조는 고심 끝에 어린아이를 뽑아서 왜검술을 익혀 장차 나라를 지킬 무사로 키우려고도 했습니다. 다음은 선조가 훈련도감에 특별히 내린 전교입니다.

“우리나라의 습속은 남의 기예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항왜(降倭)가 많이 나왔을 때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아, 이들을 장수로 삼아 검술을 배우라고 친교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모두 흩어 보냈으니 탄식할 일이로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왜인의 검술을 주야로 익히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선조의 말그대로 비통한 심정한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나요. 임금인 자신이 그렇게도 명을 내렸건만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조정의 대신들도 참으로 한심하지 않나요.

아무튼, 조선은 임진왜란 후 사무라이들의 검술 실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들만으로 항왜군(降倭軍)이라 하여 독립 부대를 만들어 전투에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북방 여진의 반란을 토벌하거나 경기 지방에서 발생한 토적을 소탕하는데 이들을 동원한 것이죠. 이들 항왜군이 크게 활약한 것은 이괄의 난입니다.

인조 반정이 일어난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평안도에서 난을 일으킨 이괄의 휘하에는 당시 여진(후금)을 상대하기 위한 최정예병 1만2천 명과 임란 때 귀순한 항왜병 130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괄은 이들 병력을 거느리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인조는 공주로 피란까지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항왜들은 뛰어난 검술과 용감성으로 탁월한 전과를 올려 조선 관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숫자는 불과 130명이었지만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발휘한 것이죠.

부산진성_결투.jpg

'대쥬신제국사'에 실린 부산진성 결투 장면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조정에서도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 사무라이들을 급히 청하여 이들을 대적케 하려고 했을 정도지요.

하지만, 항왜를 통한 조선군의 왜검술 연마는 숙종 때에 이르러 거의 맥이 끊어지고 맙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항왜의 대가 끊어지고, 조선 군영의 장졸들도 왜검술을 등한시했기 때문이지요. 당시의 장졸들은 왜검술보다는 월도와 협도 등 참마도(斬馬刀) 계통의 장병기를 선호하였습니다. 참마도는 긴 자루에 날이 달린 무기인데, 임란 당시 일본도에 맞서 그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바 있지요.

왜검술이 다시 조선에 소개된 것은 김체건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통해서입니다. 김체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지요. 기대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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